야마모토 사쿠베 씨와 탄갱 기록화
탄갱의 방문자

현재는 거의 볼 수 없게 된 방문자들

탄갱 생활에는 별다른 오락도 없었기 때문에 가끔 연예인이나 상인이 오면 군중이 몰려왔다고 합니다. 현재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사쿠베 씨가 본 적이 있는 탄갱의 방문자를 소개해 가겠습니다.

칼을 먹어보이는 곡예사(가두 마술사)

왜나막신의 이빨 교체
현대와 같이 신발 종류가 없었던 메이지 시대에는 왜나막신이 가장 많이 사용되던 신발이었습니다. 죽순 껍질로 만든 실이었기 때문에 끊어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 왜나막신의 이빨 교체집은 탄갱에도 빈번하게 모습을 보였었습니다.

통의 테두리 교체
통이나 바케츠가 없었던 시대에는 일가에 하나는 있어야 되는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의 바닥 교체나 테두리 교체를 하는 사람도 많아서 탄갱에는 자주 방문했었습니다.

주물쟁이
냄비, 솥 등의 주물을 수선하는 사람으로 소형 풀무를 메고 해오던 가장 중요한 직업중의 하나였습니다. 보수에는 주로 놋쇠를 녹여서 넣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에 있는 놋쇠제 기구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냄비・솥 등을 수선하는 주물쟁이

담뱃대 교체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사람은 적었으며, 탄갱 사람들의 대부분은 살담배였습니다. 노소에 관계없이 허리에 담배를 넣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담뱃대 교체도 빈번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장인도 거의 매일 모습을 보였습니다.

안마
탄갱에 온 안마는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삐~삐~라고 피리를 불면서 하는 사람은 적으며, 처나 자식에게 끌려 터벅터벅 하고 있는 경험이 적은 사람이 많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램프팔이
램프는 당시에는 밤의 필수품으로 램프를 팔거나 수리를 하려고 탄갱에 왔다고 합니다. 매다는 방식과 설치식의 램프가 있었는데, 보통 가정에서는 매다는 방식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곡예사
가두 마술사를 가리키며 탄갱에는 때때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술이나 칼을 먹는 것, 담뱃대를 먹는 것 등의 신기한 곡예를 보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봉래콩팔이」는 어린이들에게 큰 인기

봉래콩팔이
머리 위에 얹은 통에 콩과자가 10개 정도 들어있는 삼각 봉지를 넣어 팔고 있었습니다. 그 과자는 안에 콩이 들어있어 딱딱했다고 합니다. 통에는 콩과자 뿐만 아니라 국기나 해군기, 풍차 등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곡예사와 같이 눈에 띄는 화려한 옷을 입고 북을 때리고, 익살스러운 춤을 추면서 하는 장사였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경단 세공
경단의 원료는 멥쌀이 많았던 듯하며, 가는 젓가락 끝에 벚꽃, 국화꽃, 귤 껍질, 새 등 실물에 가깝게 만들어졌습니다. 보통 1개가 1, 2전으로 비싼 것은 5전, 10전짜리도 있었습니다. 기술이 필요한 장사였습니다.

「분마와시」는 게임 감각의 제비뽑기. 당시에도 큰 인기였습니다

엿 세공
경단 세공과 마찬가지로 숙련을 필요로 하는 장사였습니다. 가는 대나무를 입에 넣고 숨을 들이쉬면서 부는 정도나 손의 교묘함으로 조금 따뜻하게 한 갈색 엿으로 새나 표주박을 만들어 그것에 적색이나 청색의 색을 넣어 1개에 1전으로 팔았습니다.

분마와시
「돗코이돗코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두꺼운 백지 중앙에 심봉을 세우고, 그 심봉에 가는 나무(끝에 실로 면봉을 매달고 있다)를 옆에 붙여, 1회 1전으로 돌리게 했습니다. 침이 경계선에서 멈추면 경품인 과자를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비뽑기
경품은 적색이나 백색인 크고 작은 과자였습니다. 상투 끈으로 백개 정도 묶음을 만들고 그 안에 10개 정도에 일, 이, 삼이라고 숫자를 기입하고 있는 종이조각이 있었습니다. 전기의 과자를 숫자로 나누고, 종이조작이 붙은 당첨 실을 뽑으면 그 번호의 과자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1회 1전으로 1원의 과자가 당첨된다」라며 흥을 돋우고 있었지만, 좀처럼 당첨되는 적이 없고 탈락 뿐이었습니다.

다시마팔이
감색 바탕의 흰 무늬 기모노에 감색 손등싸개 각반, 짚신을 신은 모습으로 다시마를 넣은 대나무 소쿠리(입구가 둥글고 바닥은 각형)를 머리 위에 얹어 팔고 있었습니다. 가격도 싸고 품질도 좋아서 잘 팔렸습니다. 오시마에서 온 여성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머리에 대나무 소쿠리를 얹은 다시마팔이. 좌측은 고추팔이

벼룩잡는 가루팔이
「어젯밤에 물린 적을 물리친다~벼룩잡는 가루 벼룩잡는 가루」라고 말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1개 10전(함석캔에 들어있음)으로 이것은 쌀 1되분의 대금과 같았기 때문에 좀처럼 살 수가 없고, 알고있었는지 벼룩잡는 가루를 파는 상인도 가끔씩 모습을 보일 정도였습니다. 제충국화로 만들었기 때문에 눈이나 코에 자극이 강했다고 합니다.

생강팔이
크고 깊은 대나무 소쿠리에 넣어서 팔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고급 식료품이라고 불렸지만, 청어요리에는 빼놓을 수 없는 진미였습니다.

밀기울
큰 소쿠리에 많이 쌓아서 팔고 있었습니다. 밀가루가 원료로 아침의 된장국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사쿠베 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조청을 넣은 생강즙
조청과 녹말가루를 뜨거운 물로 녹인 것으로 1합이 1전에서 2전 정도였습니다.

생선 행상인. 당시의 탄갱에는 생선가게가 없었으며 행상인으로부터 구입했었습니다.

얼음장수
한여름의 2개월간 정도의 계절 장사였습니다. 설탕물을 뿌리기만 한 빙수였지만, 당시에는 아이스크림 등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인기가 었었습니다. 방울을 흔들며 「간고리, 간고리」라고 하면서 팔고 있었습니다. 곱배기는 2전, 소량은 1전이었습니다.

생선행상
당시의 탄갱에는 현재와 같은 생선가게가 없었기 때문에 생선은 행상인으로부터 구입했습니다. 그렇지만, 냉동저장 방법도 없고, 게다가 마차에 의한 운반이었기 때문에 여름에 생선을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탄갱에 운반되어 오는 것은 말린 것이나 소금에 절인 생선이 중심이었습니다.

탄광 생활을 그린 1매  저층탄에서의 후산
석탄의 층이 낮으면 석탄의 반출이 지극히 곤란했었습니다. 선산의 진행(석탄 채굴)이 빠르며, 천장과 목함(석탄 운반용 목함)와의 간격이 좁기 때문에 후산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단위가 없다」고 불리는 저층에서는 천장과 목함과의 사이가 15센티미터 정도 밖에 없었던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