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kubei Yamamoto, a painter

야마모토 사쿠베는 본토박이 탄갱부이다.

지쿠호의 석탄 출탄량이 100만톤을 기록한 기념할 만한 메이지 25년(1892년) 5월17일, 부친인 야마모토 후쿠타로, 모친인 시나의 차남으로 후쿠오카현 가마군(이후의 가호군) 가사마쓰무라쓰루미오(현재 이즈카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온가가와의 뱃사공이었는데, 지쿠호 지역의 석탄 운송이 배 운송에서 철도로 옮겨가면서 갱부가 되어 가미미오 탄갱을 비롯한 지쿠호의 작은 탄갱을 전전했다. 사쿠베도 7, 8살경부터 형과 함께 갱내에 들어가 탄차를 미는 등 가계를 도우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메이지 39(1906)년, 15세에 가호군 야마우치 탄갱에 갱부로서 입갱한 것이 갱부 생활의 시작이며, 그 이후 쇼와 30(1955)년에 다가와시 이토탄갱을 폐산함에 따라 퇴직할 때까지 약 50년간 옮겨산 탄갱은 18개나 된다. 쇼와 59(1984)년 12월19일 사망. 향년 92세.

야마모토 사쿠베(1892-1984)
하시모토 마사카쓰 씨 촬영

사쿠베가 그림을 그리려고 한 것은 형과 함께 갱내에 들어가기 시작한 초등학교 2학년경으로, 동생의 명절에 지인으로부터 받은 가토 기요마사의 무사 인형을 반복해서 사생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소년기에는 일시적으로 광부를 그만두고 화가를 목표로 후쿠오카시의 페인트상에 제자로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가정의 사정도 있어서 결국에는 탄갱에서 갱부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 이후 약 40년간은 일상 생활에 나날을 보내 붓을 잡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탄갱 기록화를 그리려고 붓을 잡은 것은 이토 탄갱 폐산후인 쇼와 32(1957)년, 다가와시 유게타의 나가오 광업소 본사무소의 야경숙직원이 된 후로, 말레카 해협의 해전에서 전시한 장남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기분을 전환하려고 일기의 여백 부분이나 광고지 뒷면 등에 탄갱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리기 시작한 탄갱 그림을 도화지에 묵으로 그린다는 것을 생각한 것은 쇼와 33(1958)년 5월부터의 일로 「탄갱은 사라지고, 지쿠호 524의 불순물산은 남는다. 이윽고 여백도 적어졌다.손자들에게 탄갱 생활이나 탄갱 작업이나 인정을 적어남기자고 생각했다. 문장으로 적는 것이 빠르지만 몇년이 지나면 읽지도 않고 청소할 때 버릴 지도 모르고, 그림이라면 조금 보기만 하면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두기로 했다.」(「자필연보」)에서 술회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다고 하듯이, 그리기 시작하면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을 정도로 몰두하고 있었다. 이 탄갱 기록화가 나가오광업소 회장인 나가오 다쓰오의 눈에 들어온 것이 쇼와 36(1961)년 겨울이었다. 작품은 그 때에 이미 어린이용 스케치북(세로 25.5센티미터, 가로 35.5센티미터)으로 15권, 약 220매나 되었다. 메이지 중기의 탄갱, 갱부를 묘사한 「옛날 탄갱의 사람들」으로 시작해서 갱내・갱외 노동, 시설・관리, 생활, 속신, 재수, 탄갱을 방문한 예능인・상인, 유행가, 동물, 쌀 소동, 싸움, 린치, 주요 사건 등을 테마로 강한 터치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한 장 한 장에는 해설문도 적혀있었다. 탄갱 노동자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기록화가 보는 사람들을 감동시켜, 이윽고 편집 출판 얘기가 나와 쇼와 37(1962)년 5월, 주코광업주식회사의 기소 시게요시를 중심으로 한 중소탄광의 광주 사이에서 출판 계획이 추진되었다. 때마침 에너지 혁명에 의한 탄광의 스크랩 앤 빌드 정책이 추진되어 중소 탄광이 위기적 상황으로 된 시기였다.

야마모토 사쿠베의 『메이지, 다이쇼 탄갱 그림책』은 그런 쇼와 38(1963)년 9월에 메이지 다이쇼 탄갱그림책간행회로부터 자비 출판되었으며, 책의 「서두」에 의하면 「이 그림책의 원래 형태는 약 20권으로 정리된 300여장의 묵화」로, 「그것을 140매로 줄여서 수록했다」고 한다. 사쿠베는 자신의 그림이 책으로 출판되는 것이 결정된 때의 기쁨을 꿈과 같고, 부끄럽기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메이지, 다이쇼 탄갱 그림책』은 그 특유함에도 불구하고 극히 한정된 범위에 배포된 정도로 서점에 나열되는 일은 없었다. 매스컴의 반응도 NHK TV가 같은 해 10월 「교양 특집-지쿠호 100년」에서 작품을 소개한 것에 그쳤다.

쇼와 37년 2월, 다가와시립도서관 관장인 나가스에 도시오가 나가오 다쓰오와의 인연으로 사쿠베와 알게 되고, 나가스에는 사쿠베 노트와 사쿠베 그림이 지니는 자료적 가치에 주목해 스스로 사쿠베 노트의 필사를 하는 한편, 다가와 향토연구회가 쇼와 39년 6월부터 시작한 「탄갱자료를 모은 운동」에 협력을 구해 이것에 흔쾌히 응한 사쿠베는 같은 해 11월부터 23매의 스케치북(세로 25.5센티미터, 가로 35.5센티미터)에 수채화로 탄갱의 어린이 그림을 그려 시립도서관에 기증했다.

나가스에는 사쿠베의 호의로 다시 탄갱 자료로써의 기록화 제작을 의뢰해 묵화로 그렸던 300여장의 모티브를 베이스로 자료적 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 채색을 하도록 부탁해 대형 켄트지(세로 38센티미터, 가로 54센티미터)와 보통의 수채 도구로부터 보존도가 높은 안료를 제공했다.

이후 사쿠베는 새롭게 탄갱 기록화를 2일에 1매의 페이스로 채색화를 그려 쇼와 41(1966)년말까지 260여장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사쿠베가 74세인 때의 일이다. 묵화의 소박하면서 강한 붓의 터치에 비교해 색을 칠함으로써 셈세하고 치밀함이 생겨났다.

이 사쿠베의 탄갱 기록화를 우에노 에신의 소개로 NHK 교육TV에서 다뤄 특별 프로그램 「어느 인생 - 불순물산이여」라고 방영한 것이 쇼와 42(1967)년 2월. 그것이 우연하게도 고단샤의 편집부 눈에 들어간 것이 같은 해 연말 『회문집 탄광에 산다』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나가스에도 또한 채색화를 완성한 후에 묵화와 함께 본격적인 탄갱 기록화집의 출판을 생각해 지인인 기무라 히데후미, 우에노 에신, 다나카 나오키 등과 함께 쇼와 48(1973)년에 『야마모토 사쿠베 화문 지쿠호탄갱 그림책』을 간행했다. 『탄광에 산다』에서 『지쿠호 탄갱 그림책』의 간행에 걸쳐서 매스컴이 다룬 것도 있어서 그 수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야마모토 사쿠베의 탄갱 기록화는 전술한 것과 같이 그림과 글이 합체한 수법을 취한 만큼 양쪽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해 작자가 의도한 것이 선명하게 전해졌다는, 일반적인 그림책의 감상과는 다소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없는 한 사람의 광부가 스스로의 체험을 토대로 메이지, 다이쇼에서 쇼와 초기에 걸친 탄갱의 모습을 놀랄만한 정확도와 치밀함으로 극명하게 그리고 있어서 유례를 볼 수 없는 탄갱 기록화로써 평가를 받았다. 탄갱 노동을 경험한 자 밖에 그릴 수 없는, 상세부에 걸친 갱내 작업에서 갱부의 생활, 탄갱 사회가 거기에 있었다. 생활의 실감을 통해서 태어난 「탄갱 생활지」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584점(묵화 원화 306점, 수채화 278점)이, 탄갱 사회의 여러 분야가 구체적으로 그려진 귀중한 역사민족 자료로써 헤세 8년 7월3일자로 후코오카현의 유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것 외에, 헤세 23년 5월25일자로 다가와시가 소유하는 회화 585점, 일기 6점, 잡기장이나 원고 등 36점과 야마모토가가 소유하고 후쿠오카현립대학이 보관하는 회화 4점, 일기 59점, 원고 등 7점의 합계 697점이 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모리모로 히로유키(상공관광과 과장보좌・전 석탄자료관 학예원)